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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함께 의거 시도했던 우덕순, 그의 생애로 본 독립운동과 친일 사이의 인간적 갈등

by 보통우편 2024.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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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면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죠.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안중근 의사. 그런데 그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 의거를 도모했던 분이 또 있습니다. 우덕순 의사라는 분인데요.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된 분입니다. 

 

그런데, 우덕순 의사의 생애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행적과 함께 그 반대의 행위를 한 것으로 보이는 행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평가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로 보여요. 그렇지만, 우덕순이 건국훈장 독립장까지 받은 걸 보면 우리 민족의 복잡한 역사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 독립운동과 친일 행위 간의 모호한 경계에서 갈등하며 고민했던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덕순 의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초기 생애와 독립운동의 시작

  • 우덕순 의사는 1885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 동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자수성가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을 결심하고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 그 해 겨울,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학교를 세우고 청년 교육을 통해 민족구국운동에 나섰습니다. 이후 1907년에는 안중근, 이범윤과 함께 의병을 양성하고, 정예 용사 300명과 함께 1908년 국내로 잠입하여 일본 군영을 습격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

  • 1909년,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어느 기차역에서 내릴지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우덕순과 안중근은 각각 차이자거우 역(길림성 서북로도(西北路道) 신성부(新城府) 채가구역(蔡家溝驛))과 하얼빈 역에서 대기를 하기로 한 것이죠.
  • 이토 히로부미가 차이자거우 역을 무정차로 통과하고 하얼빈 역에서 정차해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치르게 됩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성공적으로 처단했지만, 우덕순은 이토를 저격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체포와 복역

  • 안중근 의사가 체포된 후 우덕순 역시 공범자로 체포되어 뤼순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함흥 감옥에서 탈출한 사실이 드러나 추가 형량이 부과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1915년에 출옥하였습니다.

1920년대

  • 만주에서의 활동: 1920년대 초반, 우덕순은 만주 지역으로 돌아가 독립운동과 교육·종교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그는 만주에서 한국 동포들의 생활을 돕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지역 사회의 교육과 종교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 일제의 탄압: 이 시기에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우덕순도 이런 상황 속에서 활동을 계속하며,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1930년대 ; 친일 행적 시작

  • 친일 행보 의심: 1930년대 중반부터, 우덕순의 행보는 친일로 의심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부 일본의 지배에 협조적인 활동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신뢰를 잃기도 했습니다.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논점 중 하나입니다.

해방 전

  • 정치 활동: 해방 전, 우덕순은 정치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행보는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았으며,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가 갈리기도 했습니다.
  • 해방 후 준비: 1940년대 후반, 그는 한국의 해방을 준비하며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역할을 다하려 했으나, 정치적 상황과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해방 이후의 활동과 정치적 논란

해방 후 활동

  • 출옥 후 우덕순은 만주 지역에서 교육과 종교 사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했습니다. 1923년부터 하얼빈 조선일보 분국에서 활동하며 동포 사회에 기여했습니다.
  • 광복 후, 그는 헤이룽장성의 한인민단 위원장이 되어 동포들의 본국 수송에 힘썼습니다. 이후에는 정치 활동에도 참여하며 1948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친일 행적 논란

  • 그러나 그의 정치적 행보는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일본 제국의 압박과 시대적 상황 속에서 친일적인 행보를 보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점은 그의 독립운동과 정치적 선택 간의 복잡한 갈등을 반영합니다.

1950년과 이후

  • 1950년 한국 전쟁 중 북한군에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결론

우덕순 의사의 생애를 살펴보면 독립운동가로서의 헌신과 더불어 그가 처한 시대적 어려움, 그리고 그에 따른 정치적 선택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과 그 후의 정치적 행보는 그가 직면한 시대적 갈등과 개인적인 고민을 보여줍니다. 독립운동의 불꽃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동시에,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복잡한 선택을 해야 했던 그의 생애는 단순히 '독립운동가' 혹은 '친일파'로 구분하기 어려운, 깊이 있는 역사적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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